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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2021-02-10 / 사회복지사
설날에 대해 자세히 알아봅시다

2021년 설날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막상 새로운 해가 될 때마다 맞이하는 설!

올해는 조금 거리를 두고 지내야 하는 아쉬움이 있는데요~!

설날의 기원과 풍습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설날은 한 해의 첫 날을 기리는 명절이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한국에서 설날은 양력 1월 1일(양력설이자 새해 첫날)과 음력 1월 1일(음력설) 모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본 문서에서는 한국의 명절인 음력 1월 1일 음력설에 관해서만 기술한다.[1]

음력 1월 1일 설날은 추석과 함께 대한민국 최대의 명절 중 하나이자 전날과 다음 날을 포함한 3일이 법정 공휴일이다. 섣달그믐이 윤달일 경우 윤달만 휴일로 인정되고 평달은 휴일이 아니다. 이는 윤12월이 생길 경우 12월 → 윤12월 → 1월 순서대로 달이 바뀌기 때문.

음력설의 날짜는 음력 1월 1일이다. 구정, 정월 초하루, 음력설로도 불리며 한자어로는 신일(愼日),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단월(端月), 원일(元日) 등으로 불린다.

영어로는 'Lunar New Year's Day', 'Chinese New Year's Day', 'Korean New Year's Day'로 번역한다. 다만 'Korean New Year's Day'는 거의 안 쓰이거나 매우 드물게 사용되고 'Chinese New Year's Day'가 영미권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인데,[2] 요즘은 공식석상이나 언론 등에서 의식적으로 비국가종속적인 'Lunar New Year's Day'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설날" 풍습 등에 대해 얘기할때는 드물게 "Seollal"이라고 쓰기도 한다.

동아시아 및 그 영향을 받은 중국대만베트남싱가포르몽골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도 태음태양력 기준으로 한국과 같은 날에 음력설을 쇤다. 명칭은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도 춘절과 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쇼가쓰(正月)란 이름으로 같은 날에 설을 쇠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음력을 완전히 금지하고 양력 1월 1일로 바꾸었다.[3] 북한도 양력 1월 1일 양력설을 한 해의 첫날이자 중요한 명절로 여기고 있으며, 음력 1월 1일이 공휴일이 된지는 얼마 안됐다. 북한은 양력설을 “설날”이라 칭하고, 음력 1월 1일을 휴식일이라 하여 하루 쉰다.

즉, 정리하자면 한자문화권에서 한국중국홍콩대만베트남은 음력설을, 북한과 일본은 양력설을 쉰다.

 

 

설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역법체계가 갖춰져야만 지낼 수 있는 명절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오래전부터 지내던 명절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태음력에서 역법 전체의 기준이 되는 달은 동지가 든 달이다. 여기에 동짓달을 기준으로 12지를 적용해서, 동짓달이 자월(子月), 그 다음 달이 축월이라는 식으로 나가는데, 역법은 초기부터 문제가 생긴다.

 

夏以建寅之月, 殷以建丑之月, 周以建子之月爲正

하나라는 인월을, 은나라는 축월을, 주나라는 자월을 정월로 본다


- 춘추 은공 원년조 공영달(孔穎達)의 주석 

 

 

즉, 하.은.주 어디의 역법을 쓰느냐에 따라서 정월이 변한다는 이야기다. 참고로 전국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고육력 중 위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역법 중 황제가 만들었다는 황제력과 노나라 역법인 노력은 주나라와 마찬가지로 동짓달 첫날이 새해의 시작이었고, 전욱이 만들었다는 전욱력은 '동짓달 전 달인 해월'(음력 10월)이 정월이 된다. 참고로 진시황의 진나라가 전욱력을 사용했다. 이후 한무제 때에 하력을 복원시켜서 음력 1월을 설날로 만들고, 동짓달을 11월로 고정했는데, 이것이 태초력이다. 이후 중국 역법은 수많은 자잘한 수정을 통해서 역법이 완성되어 가는데, 중간에 서양역법이 들어와서 태양태음력이 되었고 그중 최종본이 청나라대에 완성된 시헌력이다. 이 때문에 공식적으로 음력 1월이 정월이 되고, 음력 1월 1일이 설날이 된 것은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5]


부여가 자체적인 역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이미 부여시절부터 설날의 풍습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설날의 풍습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에 전해지는데 수서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원일, 즉 새해 첫날에 서로 문안을 드리고 왕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군신들을 격려하며 일월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이왕이 정월에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고 책계왕 때 시조 동명왕에게 정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설에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전통도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중요명절로 설날은 빠지지 않았는데 이는 설날이 이미 오래전부터 중요한 명절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전통적으로는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는 쭉 이어지는 축제 기간으로 이 기간 중에는 빚독촉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 뒤 1894년 갑오개혁 및 1895년 을미개혁이 시행되면서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1910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훈령을 통해서 앞으로는 조선인들도 일본인들처럼 양력 1월 1일인 신정(新正) 때 의무적으로 명절을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음력설에 명절을 보낸다거나 세배를 가게 될 경우 즉시 엄벌에 처한다거나 해당자들의 생활적 제재 등을 가할 것이라는 공포(公布)를 내리기도 했다. 또 각 지방 떡방앗간 등에도 음력설에 떡을 치거나 돌릴 경우 그 업소에 대해서는 처분이나 영업중지 등을 가할 것이라는 훈령도 내렸다. 실제로 일본은 음력설에 세배를 가거나 귀성을 하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순사들을 통해서 감시 및 통제를 통한 단속에 나섰으며 일부에서는 오징어 먹물이나 검은 물로 된 물총을 발사하여 음력설을 쇠려는 조선인들의 명절 귀성이나 세배길을 방해하기도 했다. 특히 흰 소복(素服)을 입은 조선인들은 가장 먼저 표적이 되었다. 신정(新正) 이라는 말 또한 일본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음력설 도 그에 맞춰 구정(舊正) 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일제의 처벌 및 제재 등에 대한 두려움과 눈치 때문에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인들처럼 양력설(새해 첫날)에 명절을 보내는 성향과 그래도 1000년 동안 내려온 전통풍습을 지키고 조상에 대한 무례 등을 우려하여 그대로 음력설을 보내는 성향이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음력설을 없애기 위한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끝내 음력설을 결국엔 없애진 못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에는 신정만 연휴였고 설은 아예 공휴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승만, 장면 정권 때는 대부분 재량에 따라 설날에는 휴무하였기 때문에 '이중 과세(過歲)'[6]가 가능했다.[7] 그러나 전두환 정권 때 '민속의 날'이라 하여 설날을 공휴일로 공식 지정함으로써 이중 과세가 부활했고[8], 노태우 정권 때는 민속의 날을 '설날'이라고 이름을 바꾼 뒤 하루만 쉬던 걸 지금과 같은 3일 연휴로 만들었다.[9] 그 대신 신정 연휴는 하루 단축되었다. 이로써 음력 설이 진짜 설날로 확실히 자리잡게 되었다. 게다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10]로 1999년부터는 1월 1일 단 하루만 쉬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신정을 쇠는 집안도 있으며 그런 경우 공무원 집안이 많다고 한다. 설을 쇠는 것이 금기시되던 시절에 특히 공무원들이 솔선수범하여 신정을 쇠도록 독려했기 때문이며, 또 다른 경우로는 가족의 합의에 의해 양가 가족을 모두 방문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한[11] 것도 있다. 서양권 사람들과 국제결혼을 한 사람이면 문화적 차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두 설날 모두 쇠기 쉽다.

최근 중국인들은 춘절이 중국의 전통이라며 한국은 춘절을 베낀 설날을 지내는 걸 그만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중이다. 바이두에 한국 춘절을 검색해보면 한국에 대한 증오와 함께 정치적으로 압박해서 설날을 없애야 한다는 글이 수백개가 넘어간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인들의 억지 주장은 어딜 가나 중국 공산당의 압박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화공정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반크는 중국의 노골적인 설날 침탈에 맞대응하기 위해 유엔의 "중국 설날" 표기 우표에 대해 규탄하며 유엔의 "중국 설날" 옹호를 무력화시키는 청원을 올렸다. 

 

 

설날에는 다양한 풍습들이 있었는데 차례세배떡국, 설빔(새옷), 덕담, 문안비, 설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귀 쫓기, 청참, 윷놀이, 널뛰기 등이 그것이다. 그중 설날의 대표적인 풍속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세배로 원래는 차례가 끝난 뒤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차례가 끝나면 조부모.부모.백숙부모.등 차례로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 한다. 집안의 세배가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받은 측에서는 어른에게는 술과 밥, 아이에게는 과일과 돈으로 대접하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요즘에는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고 세뱃돈을 받는 풍속이 있기 때문에[12] 어른들보단 아이들이 더 손꼽아 이 날을 기다리기도 한다. 원래는 과 과일 같은 간식들을 내오는 게 보통이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을 주는 걸로 바뀌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돈을 주는 풍속이 중국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설날에 결혼을 하지 않은 자식들에게 돈을 많이 벌라는 의미로 붉은 봉투[13]에 돈을 조금 넣어서 주는 풍습이 있다. 일본에서도 お年玉(오토시다마)라고 해서 작은 봉투에 용돈을 담아서 준다. 세배는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세배가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와 충돌한다고 해서, 무슬림들은 절하는 것이 알라에게 예배할 때만 허용된다는 교리에 따라 세배를 하지 않는다. 만삭 임산부들도 몸이 허락하지 않으면 세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개신교인은 추도예배를, 천주교인은 위령미사를, 불자들은 초하루법회와 명절법회를 드리기도 한다.

설날 전이면 신권을 바꾸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각 지역의 은행에 모이게 된다(그러면서 은행은 의도치 않은 핫플레이스가 된다.) 그래서 신권을 교환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한국조폐공사는 시도 때도 없이 돈만 발행한다. 그 중에서 만원권만. 손자와 자녀들에게 줄 용돈에서 5만원권은 너무 많고 달랑 몇 천원 주자니 적어서 가장 만만하게 아이들한테 줄수 있는 단위가 만원이기 때문이다. 은행에서는 이때면 신권이 너무 발행돼서 깨끗한 돈이면 된다고 몇년째 홍보하는 중이다. 

 

- 설날 노래 -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 받기 좋아하세요

우리 집 뒤 뜰에는 널을 놓고서
상 들이고 잣 까고 호두 까면서
언니하고 정답게 널을 뛰-고
나는 나는 정말로 참말 좋아요

무서웠던 아버지 순해지시고
우리 우리 내 동생 울지 않아요
이집 저집 윷놀이 널뛰는 소리

나는 나는 설날이 참말 좋아요 

 

*여기서 까치는 조류 까치와는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아치설이 유력한데, 시간이 지나면서 까치로 바뀐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namu.wiki/w/%EC%84%A4%EB%82%A0